보수주의, 하나님 인정하는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 : 정치 : 기독일보


개항 이후 민씨정권이 개화정책을 서두르자 지방 양반세력의 불만이 커졌다. 1880년에 청나라 황준헌의 『 조선책략』이 국내에 반포되면서 유생들의 격렬한 척사위정상소가 이어졌고, 소외감이 상대적으로 더 컸던 영남의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렸다. 1차 봉기한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한 뒤에도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면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동학농민군은 10월에 다시 봉기하였다. 이 제2차 봉기에는 동학의 남접주53뿐만 아니라 북접주54도 가담하였으나, 12월에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1894년 2월부터 1895년 초까지 계속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농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일부는 이후 전개된 반일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풍속화는 이전부터 윤두서, 조영석 등의 사대부 화가들이 그리기 시작하였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궁재 김득신 등의 화원들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판소리계 소설의 영향은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사회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룬 일련의 우화소설에서도 발견된다. 「 토끼전」이나 「 장끼전」 은 판소리로 불리던 것을 소설화한 판소리계 우화소설이다. 이들 각각은 힘없는 토끼와 자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부패한 봉건군주 용왕의 향락과 탐욕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가 하면, 장끼부부를 통해 절대적인 궁핍으로 말미암은 가정의 파괴와 그 극복을 형상화하고 있다.


아울러 종족의 공동 이익이나 상호 부조를 위한 종계(宗契)주167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노비 중에는 토지나 가옥뿐만 아니라 다른 노비까지 소유한 자도 있었는데, 이는 법률로도 인정되었다. 특히 농장(農莊)을 관리하는 간복(幹僕)은 대단한 재산과 권세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비 중에는 공장으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 근대적 내용을 갖추어 갔으나, 관료제도와 중앙집권체제의 본질적 혁신을 추구하지는 못하였다. 1897년 고종이 황제를 표방하여 국호를 바꾸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여러 부문에서 근대로의 변화가 진행되었으나, 정치적 변화는 미진하였다. 관료제도 또한 겉모습은 근대적으로 바뀌는 듯하였으나 본질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였다. 특히 황제가 전근대 군신관계를 바탕으로 한 정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근대적 중앙집권체제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각각의 경우마다 속미음에 들어가는 인삼의 분량과 복용하는 기간이 다르게 규정되어 있다. 대개는 국휼이나 사친상 때 받는 스트레스가 보다 크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인삼의 분량과 복용기간을 늘리도록 했던 것이다. 인삼속미음을 복용하는 이유는 상중에 효성을 표현하기 위해 음식을 줄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국왕은 상중에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소선(素膳)을 하게 되는데, 반면에 신하들은 왕의 식사가 부실하여 건강을 해치게 될까 염려하여 되도록 전처럼 식사를 하도록 간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소선에서 신하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왕이 고기반찬을 들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질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왕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바로 이전처럼 수라상을 들지 않았으므로, 이와 같은 신하들의 요청을 뿌리치기 일수였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 초인 1410년(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죽은 자를 지키는 동쪽의 수호신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자가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무덤 네 벽에 동서남북 방위를 다스리는 사신四神을 그렸다. 그림 속 청룡은 큰 눈에 긴 혀를 내밀고 있고 몸통이 도마뱀과 같이 얇다. 세조 4년(1458) 경회루에서 대소신료를 불러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정인지는 세조의 면전에 두고 역사에 남을 말을 남긴다.


조선전기 세종조에는 북방계열 귀화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동화모형의 정책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방인(여진족 등)은 흡수 통합해야 할 집단으로 보았으며, 특히 여진족의 경우는 추장이 부족과 함께 귀화할 경우 벼슬 등을 내려 적극적으로 조선인으로 동화 흡수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부분적으로 중국출신의 향화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일종의 특권을 인정하는 유사-다문화주의모형을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명청교체기에는 향화인에 대한 청나라의 압송, 송환요구에 따른 외 교문제가 발생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건국 초의 중국인에 대한 정책이 이후에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일본출신의 귀화인에 대해서도 동화주의 모형에 해당하는 정책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향화인에 대한 논의 기록들에 나타난 군역에 대한 논의와 조세에 대한 논의에 비추어 볼 때, 향화인이 조선으로 동화되기 위한 법적 권리와 의무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중신들은 처벌을 간청했으나 세조는 “늙은 영감이 그랬는데 뭘 그러냐”라며 의외로 그냥 넘어간다.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났고, 이미 퇴역한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문종이 또 이혼했다간 왕실과 문종의 평판이 나빠질까봐 순빈을 안고 간다.


1674년(숙종 즉위)의 갑인환국 이후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까지 50여 년간 아홉 차례 환국이 발생하였다. 아직 환국정치의 초입부인 1685년(숙종 11)에는 낭관의 인사권 행사를 제한하여 환국이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되었다. 숙종 전반기에는 남인과 서인 사이에서 정국의 주도권이 바뀌는 형태로 환국이 전개되었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북인세력이 남인세력의 대표적 관직자인 유성룡을 공격하면서 두 붕당의 거리는 더욱 벌어졌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두 세력이 번갈아 정국을 주도하다가 전쟁 끝 무렵에는 남인이 주도권을 잡았고, 전쟁이 끝나자 척화를 주장한 북인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에 따라 건강에 문제가 있던 세종은 국정 운영 방식을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었다. 조선을 건국한 직후의 상황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새 왕조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등에 대해 권력집단 안에서도 생각이 서로 달랐다. 태조 이성계는 가장 먼저 자신의 즉위 사실을 명에 알리도록 하고, 이어서 그가 직접 군사권을 장악하고 행사해온 기구인 도총중외제군사부주1를 폐지하는 대신 의흥친군위주2를 설치하여 자신의 군사권이 변함없이 지속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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